2009년 7월 21일    

정성일 위원장님께.

오늘 감독님을 만나뵌것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 이렇게 편지를 띄웁니다.

먼저 상투적인 인사로 들리시겠지만 저는 키노의 꽤나 열혈
구독자였습니다. 허나 그것만으로는 오늘의 제 감정을 설명하기가
힘듭니다. 왜냐하면 저는 편집장 정성일의 글에 전적으로
동의하던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뭐든 현학적인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구나 영화광도 아닌 제가
왜 키노를 꼬박꼬박 사서 감독님의 글을 즐겨 읽곤 했는지
그 이유를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은 처음에 트레일러 제의 받을때 연출을 하게되면 정성일 위원장님과
식사를 해야한다는 말을 듣고 다시 못하겠다고 할까 고민한적도
있었을 정도로 겁을 먹었었습니다. 영화에 대해 아는것도 없고
별로 훌륭한 말상대가 될 자신도 없었거든요.
다행히? 박기용 감독님께서 나와주셔서 한고비를 넘기긴했는데
오늘 직접 뵙고 이토록 흥분하는 저를 보니 감독님의 존재감이
저에게 이정도로 컸다는것이 스스로도 놀랍습니다.

오늘 제게 해주신 말씀 하나하나가 모두가 인상적이어서 잊을 수가 없네요.

"이리와요. 왜 그렇게 객처럼 앉아있어요."

맞습니다. 제가 어딜가도 주인행세를 잘 못해요.
저는 무대에서조차 종종 가운데 자리에서 비껴서 있는것을
편안히 여기곤 하거든요.

로스트 하이웨이와 아비정전을 언급해 주신것도 참으로 흥미로왔는데요
오늘 기자회견중에 질문하신것에 대한 답변을 이자리를 빌어
수정하는것이 허락된다면, 제가 레퍼런스를 염두에 두지 않은것은 맞습니다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트레일러를 만드는동안
어렴풋이 '그들 각자의 영화관'이 제 맘속에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브루스웨버라는 미국의
유명한 흑백필름 전문 사진작가가 있는데 이사람이 연출한
펫샵보이스의 '빙보링'이란 곡의 뮤직비디오를 굉장히 좋아합니다.
저는 배우란 무조건 멋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서,
그것도 아주 즉물적인 의미에서 말이지요,
그 뮤직비디오에 나오는 모델들의 모습이 너무나도 매혹적으로
그려진 그 작품을 잊지 못합니다.


끝으로, 이제야 생각이 났는데 제가 왜 키노 시절의 정성일에 대해
애정과 향수를 갖고 있는가를 말씀드리려합니다. 마지막호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죠. "영화에 대한 소비를 멈춰 세우고 사유하게 만드는
방법은 스무자로 요약될 수 없는 글을 쓰는 것"이라고요.
저는 모든 예술 장르들, 음악이든 영화든 책이든 그것에 대해
이차적으로 발생하는 글들, 비평이 됐든 해설이 됐든, 기타 잡문이든
그 모든 글을 쓰는 작업의 목적은 결국에 사유하게 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그러한 글을 읽는것이 큰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엔 비록 현학적이라고 욕을 먹을지언정, 아무리
읽어봐도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을 지언정
꼼꼼하게 뜯어보고 곱씹을 만한 텍스트들을 발견하기가
힘들다는 점이 정말아쉽습니다. 바로 그것이 영화는 못봐도
영화에 대한 정성일 편집장의 글은 읽을 수 있었던 이유였었는데.

이해하실 수 있을까요? 왕가위를 그리 좋아하지는 않지만
왕가위에 대해 꿈꾸듯 늘어놓으셨던 글들을 읽는것은
무척이나 좋아했다는것을 말입니다.

8월에는 저희팀의 공연이 워낙 많아서 다가올 개막식에 참석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뵌것이 마지막일
수도 있겠네요. 건강하시고, 곧 개봉될 영화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오늘 하여주신 칭찬의 말씀들, 제가 소감을 이야기할때
곁에서 계속 격려해주신것 비록 립서비스라 할지라도,
오래도록 기억될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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